불확실성이 너무 큽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탱탱볼'과 같다고나 할까요. IMF의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역임했던 하버드대학 경제학과 케네스 로고프(Kenneth Rogoff) 교수는 미국 공영방송인 PBS와 인터뷰에서 현재 상황을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한 것 같은 느낌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황당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어쩌면 우리가 직면한 현재 위기를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금융위기가 실물경제의 위기로 확대된 것도 아니고, 일국의 위기가 다른 국가로 확산된 것도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국가에서 동시에 모든 생산과 소비활동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러자 우리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지난 90년 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가장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아닙니다.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이 강조했던 것처럼 현재 위기는 대공황 이후 가장 심각한 위기가 아니라 대공황 "수준"의 위기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20세기에 발생한 모든 위기가 재정건전성의 악화 때문이라고 주장했던 로고프조차 (재정건전성의 원칙에 눈 감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현재 위기는 절박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서유럽과 북미에서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금융 지원과 재정 지원을 합해 GDP의 30%를 마치 바주카포를 쏘는 것처럼 쏟아붓고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의 산업화된 국가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국가가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기업을 지원하고, 자영업의 운영자금을 지원하는 역사상 전례가 없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은 1980년대 이래 우리가 알고 있는 복지국가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시 복지국가를 생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실 제2차 대전 이후 자본주의 황금시대와 역사적으로 함께 했던 복지국가는 단순히 노동시장에서 발생하는 소득상실에 대응해 소득을 보장하고 사회서비스를 제공했던 분배체계가 아니었습니다. '역사적 복지국가'는 완전고용을 위해 언제든지 지출을 조정할 수 있다는 광범위한 정치적 합의에 기초한 분배체계였습니다. 역사적 복지국가에서 소득 보장과 사회서비스는 완전고용을 보완하는 부차적 정책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를 지나면서 복지국가의 목표가 완전고용을 추구하는 것에서 인플레이션을 관리하고 균형재정을 유지하는 것으로 바뀌자 복지국가의 역할도 변했습니다. 복지국가가 완전고용 대신 인플레이션과 균형재정을 추구하자 실업은 증가했고, 노동시장이 유연화되면서 불평등과 빈곤이 심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복지국가의 지출도 덩달아 증가했지만, 노동시장에서 발생하는 불평등과 빈곤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노동시장에서 악화되는 분배를 소득 보장과 사회서비스로 막는 일은 마치 가래로 막아야 할 것을 호미로 막는 것과 같았습니다.

  중간계급의 안정적 일자리가 줄어들고, 그들의 소득이 감소하자 서유럽과 북미에서는 인종혐오와 자국 우선주의를 주장하는 극우 포퓰리즘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면서 풍요로운 사회의 도래와 함께 불가역적이라고 간주되었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더불어 인정투쟁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늘어갔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경쟁자로 인식하기보다는 물리쳐야 할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풍요로운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코로나19는 이런 정치경제적 상황에서 마치 외계인의 공습처럼 우리를 습격한 것입니다. 코로나19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장기침체에 접어든 자본주의를 더 깊은 침체로 몰아넣었고, 1980년대 이래 심화된 불평등은 강력한 봉쇄정책이 취해지자 더 심각한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코로나19로 인해 탈세계화가 가속화되면서, 수출을 통한 경제성장으로 일자리를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절대빈곤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던 저개발국가의 개발모델은 위기에 처하고, 산업화된 국가들에서는 시민들의 생활수준이 낮아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코로나19를 계기로 세계 곳곳에서는 권위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처럼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코로나19를 막기 위한 봉쇄정책이 극우세력을 활성화시키고 있습니다.

  복지국가는 어떤 길에 들어서고 있는 것일까요? 역사가 다시 시작하는 것일까요? 역사적 복지국가가 자본주의의 황금시대와 운명을 같이 했고, 상승하는 노동계급과 좌파 정당의 힘에 기초했으며, 브레튼-우즈 체제라고 불리는 안정적인 국제질서와 함께했던 분배체계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코로나19 이후 복지국가가 어떤 길에 들어설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위기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더 좋은 삶을 위한 기회가 되려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정치경제적 조건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4세기 유렵에서 흑사병이 창궐한 이후 농민헌장과 같은 상대적으로 농민의 힘이 강했던 엘베(Elbe)강 이서(以西) 지역에서는 봉건제가 해체의 길을 걸었지만, 농민의 힘이 약했던 엘베강 이동 지역에서는 오히려 봉건제의 속박이 강해지는 재판 농노제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제2차 대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군나 미르달을 포함해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전후 불황을 예견했지만, 상승하는 노동계급과 좌파 정당의 힘으로 이룬 자본과 노동의 힘의 균형은 유효수요를 확대하면서 복지국가,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를 열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복지국가는 어떤 길을 걷게 될까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몇 가지 가능성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가장 현실적인 전망은 코로나19가 가한 경제적 타격으로 복지국가는 당분간 사회지출을 확대하고, 중간계급과 취약계층의 고용유지를 위한 노력을 배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2010년대 들어서면서 IMF, 세계은행 등이 주장하는 포용적 성장이라는 기조와 맥을 같이합니다. 그러나 자본의 이윤율이 계속 낮아지고,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사회지출의 확대만으로는 심각해지는 불평등 문제를 완화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첫 번째 길은 현재 위기를 일시적으로 이연(移延)하는 단기적 대응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의 연계가 약화(decoupling)되면서 반이민주의, 반인종주의, 우파적 민족주의에 기초한 반자유주의적 일국 중심의 복지국가가 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길은 디지털 기술 변화, 신자유주의에서 소외된 전통적 노동계급, 불안정 고용상태에 있는 저소득층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높은 길입니다. 실제로 극우 포퓰리즘 정당의 노선으로 폴란드, 헝가리 등에서 나타나고 있고, 스웨덴, 프랑스, 오스트리아, 영국, 미국, 독일 등에서는 그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세 번째 가능성은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경우입니다. 국가의 정책 기조가 인플레이션과 균형재정에서 고용과 임금으로 전환되면서 역사적 복지국가가 현대적 방식으로 귀환하는 것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경제 위기에 대한 서구 복지국가의 대응이 통화정책에서 재정정책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했고, 2010년대부터 IMF, 세계은행의 정책 기조가 이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대적 방식의 역사적 복지국가의 귀환을 위한 필요조건인 안정적인 국제관계는 갖추어져 있지 않고, 새로운 계급연대와 힘 있는 친-복지정당의 부재와 장기침체 국면에 빠져 있는 자본주의를 생각할 때 이 길의 가능성은 그 실현 여부를 논하는 것조차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불확실성이 일상화되는 지금, 어쩌면 이런 예측은 모두 부질없는 생각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힘이 그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힘만큼 강력하고, 분배를 둘러싼 투쟁이 어떤 누구의 희생을 강요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닐 때, 복지국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현실을 역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말씀은 사건은 사건일 뿐 전환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사학의 교황이라 불리는 페르낭 브로델의 표현을 빌리면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사건은 '먼지'와도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역사에서 사건이 세상을 바꾼 경우는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렇게 느끼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그 이전까지 누적되어온 모순을 촉발시키는 '계기'인 것입니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는 1970년대에 있었던 두 차례의 충격적인 오일쇼크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황금시대의 누적된 모순이 해소되지 못하자 오일쇼크로 인해 폭발했던 것입니다. 프랑스혁명이 새 세상을 열기까지 인류는 이백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더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코로나19 이후 지금과 다른 세계를 목도한다면 그것은 코로나19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코로나19 이전에 자본주의 체제에서 누적된 모순이 코로나19를 계기로 분출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연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사건이 아닌 그 사건이 놓은 정치경제의 역사적 맥락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 맥락을 정확히 읽어 낼 때 비로소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복지국가의 길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의 흔적을 역사에 남기는 것처럼, 코로나19도 그 흔적을 복지국가의 역사에 남길 것입니다.

수석부회장 윤홍식 드림